| [서태지와 아이들] [김건모] [김수철] [양희은] [조용필] [이미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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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와 아이들
서태지와 아이들은 1992년 4월 데뷔하여 불과 3개월 만에 신드롬에 가까운 반응을 얻으며 청소년들을 사로잡은 3인조 그룹입니다. 이들은 당시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시도되지 않은 장르인 랩에 매틀과 펑키, 소울과 같은 이국적인 장르들을 혼합한 매우 독특한 음악성을 표출하며, 단번에 국내 최고의 인기 그룹으로 부상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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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 이렇듯 막강한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이유에는 발라드와 트로트로 크게 양분되는 음악적 현실과 다국적 입맛에
길들여진 인스턴트 세대를 축으로 유행의 흐름이 좌우되는 가요계의 풍토, 10대들이 향유할
수 있는 또래 문화의 태부족 등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되는 서태지의 다양한 시도와 사회에 대한 비판과 반항 그리고 가요계의 주요 관심층인 10대의 문제의식을 적절히 지적한 것은 초기의 인기를 지속시키는 비결이 되었습니다. 특히 서태지는 학생들의 낙오자 의식을 대변하는 노래와 사회적인 관심사를 다루고 있어 청소년들 뿐 아니라 다양한 층으로부터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돌연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새로운 앨범 작업에 전념하는가 하면, 활동 재개 일자를 알려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등 독특한 자기 관리를 통한 음악인으로서의 전문성을 구축하려 했던 서태지와 아이들은 우리 가요사에 한 흐름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1996년 2월 1일 갑작스럽게 은퇴한 후, 세 사람의 활동이 주목됩니다. 대표곡으로는 <난 알아요>, <환상 속의 그대>, < 하여가>, <발해를 꿈꾸며>, <교실 이데아>, <컴백홈> 등이 있습니다. [난 알아요] [하여가] [발해를 꿈꾸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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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예전 1학년 때부터 다운타운 무대에서 아르바이트 심야활동을 시작하였고 그 후 해군
홍보단에 입대하여 음악과 관련된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제대한 후에는 "평균율"이라는 그룹에서
보컬과 건반 악기를 맡아 활약하였습니다. 다소 소울풀한 보이스 컬러는 고음역에서 호소력을 더합니다. "오늘 우리가 헛되이 보낸 시간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원하던 내일이었다."라는 좌우명으로 활동에 최선을 다하는 그는 "음악은 모든 예술을 포함한다."는 음악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랩에서 레게 발라드 댄스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꾸준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대표곡으로 <잠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 <첫인상>, <핑계>, <잘못된 만남>, <스피드> 등이 있습니다. [스피드] [빨간우산] [미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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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곧 그가 추구하는 음악과도 일치하는데, 예를 들면 3집 앨범의 수록곡인
<못다핀 꽃 한송이>라든가, 4집의 수록곡 <왜 모르시나> 그리고 <내일><나도야 간다>
<난 어디로> 같은 노래들이 긴 수명을 누릴 수 있었던 저변에는 그 시대 젊은이들의 평균적
기호도와 부합되는 음악사상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그의 노래는 다원화,
복잡화되어 가는 현대사회의 주변인으로 사회적 고립 상태에 놓인 청소년들이 느끼는
기성세대와의 단절감, 소외감, 갈등 같은 감정들이 표출함으로 해서 일종의 동병상련적인
카타르시르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노래는 젊은 세대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배려를 항상 잊지 않고 있습니다. 작은 거인에서 솔로로 활동방향을 바꾼 그는 <내일><별리><나도야 간다> 등으로 인기 기반을 구축하고 절정의 인기를 얻었습니다. 80년대에 가요계의 수많은 상을 수상한 그는 잠시 활동을 중단한 뒤 재충전의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1986년 아시안 게임 휘날레 음악에 이어 1988년에는 올림픽 전야제 음악을 발표하며 다시 한 번 "역량있는 가수"라는 호평을 받습니다. 가수로서의 활동은 중단한 채 수많은 영화 음악을 제작, <서편제>의 주제 음악으로 다시 그의 실력을 보여주었으며, 국악에도 관심이 있어 김덕수 사물놀이와도 여러 번 공연을 가진 바 있습니다. 지금도 꾸준한 작곡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그야말로 "작은거인"입니다. [못다핀 꽃 한송이] [나도야 간다] [젊은그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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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에 활동했던 제1세대 포크 가수의 다수가 그랬듯이 양희은도
저항적인 메세지를 지닌 노래를 불렀다해서 당국으로부터 해당 노래가 금지되는 불이익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뷔 앨범의 수록곡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방송 금지곡이 되고 난 후, 같은 앨범에 수록된 리바이벌 곡 <아침 이슬><세노야> 등의 노래들과, 후작들인 <서울로 가는 길><백구><작은 연못><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늙은 군인의 노래> 등의 주옥같은 노래들이 저항음악 또는 메세지 송의 노래로 해석되면서 대학가와 젊은층에서 오랫동안 애청, 애창되었습니다. 그리고 한 때는 <늙은 군인의 노래>가 금지곡으로 묶이면서 활동에 염증을 느끼고 활동을 중단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기본적으로 밝고 낙천적이며 해맑은 심성을 가진 양희은은 계속해서 꾸준한 활동을 전개하였지만, 1978년에 <늙은 군인의 노래>가 다시 금지곡으로 묶이면서 문화 당국자들에 대한 환멸과 항의의 표시로 돌연 활동을 중단하고 봉제품 수출 회사에 입사하게 됩니다. 봉제품 제조사인 아비스사의 영어 자문역으로 입사해 미국을 비롯, 불란서, 이태리 등지를 돌면서 한동안 외도에 열중하기도 했던 그녀는 1992년에 KBS-2FM에서 "양희은과 함께"를 진행하게 된 것을 계기로 활동을 재개하였으며, 결혼 후 지금까지도 꾸준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대표곡으로는 <아침 이슬><세노야><백구><새벽길><하얀 목련><한계령> <갈 수 없는 나라><잠들기 전에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나무와 아이> <내나이 서른살에> 등이 있습니다. [아침이슬] [한계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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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에 발표한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한국인의
역사적 한이 내재된 이 노래는 재일교포의 한국 방문 붐에 일조하며 다운타운에서부터
히트했으며 1년이 넘게 방송가와 다운타운가에 대대적으로 선곡되기도 했습니다. 목에 피가
날 정도로 노래 연습에 매달리기도 했으며, 한국인의 정서에 근접한 노래들을 표현하기 위해
많은 공부를 한 결과, 그는 이제껏 국내의 어느 가수들에게서도 들어보지 못한 독특한 가창력을
갖게 되었고, 듣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히트곡들을 남겼씁니다. 대표곡으로는 <돌아와요 부산항에><미워 미워 미워><한오백년><창 밖의 여자> <고추잠자리><단발머리><촛불><못 찾겠다 꾀꼬리><친구><킬리만자로의 표범> 등이 있습니다. [허공] [내마음 당신곁으로] [미지의 세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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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상잔의 6.25나 쿠테타인 5.16등 이념적 정치적 격동기를 몸소 체험해 온 그녀의 삶은
그 세대 서민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미자는 어려서부터 노래를 구성지게 잘 불렀다고
합니다. 그녀는 노래를 두 세번 들으면 마치 자신의 노래였던 것처럼 훌륭하게 재현해내곤
했습니다. 그녀는 두살 때의 아버지의 중풍과 세 살 때 부모님의 이혼, 국민학교에 입학하던 해의 6.25동란 발생, 전쟁 기간 동안의 피난생활 등은 이미자를 가정적으로 불행하게 만들었고, 어렵게 생활을 이끌어 나가는 가장의 역할을 하게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여고를 졸업할 무렵 방송국에서 주최한 노래자랑에서 1등을 차지하면서 공식적인 데뷔가 이루어졌습니다. "여류가수는 팔자가 센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봉건적 사고방식이 존재했던 격동의 50년대에 활동한 이미자는 5.16정부 당국자에 의해 1962년 설립된 방송윤리위원회에 의해서 <동백아가씨><섬마을 선생님> 등의 노래가 왜색가요로 분류되어 금지곡 처분을 받는 등 활동의 제약을 받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활동력을 보여주었고, 계속해서 주옥같은 히트곡들을 발표했습니다. 70년대에 많은 히트곡들을 발표했던 그녀는 80년대에 들어와 점차 활동에 소강 상태를 보이며 자리를 후배들에게 물려주었습니다. 활동기를 통하여 명실상부한 수퍼스타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던 이미자는, 그가 가꾸고 활약해 온 가요계를 통해서 불세출의 거목으로 후세에 전하게 될 것입니다. 대표곡으로는 <행여나 오시려나><미련에 우는 여인><두용이를 아시나요><열아홉 순정> <임이라 부르리까><돌아와 주신다면><동백 아가씨><울어라 열풍> 등이 있습니다. [동백 아가씨] [여자의 일생] [울어라 열풍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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