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의 세계화"에 불을 붙인 사물놀이의 명인 김덕수

1978년 4월 소극장 공간 사랑에서 [사물놀이]라는 이름을 내건 한 단체의 단체공연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사물을 만졌다는 4명의 젊은이들 이름이 있었습니다. 쇠에 김용배, 북에 이광수, 징에 최종실, 그리고 장구를 맡은 리더 김덕수가 그들이었습니다. 경기, 충청도 지방의 농악가락인 웃다리 풍물을 비롯하여 호남 농악 등이 발표된 이 날 공연은 청중들을 충격과 환희로 몰아넣었습니다.

1952년 충남 대전에서 출생한 김덕수는 1970년 국악예술학교를 졸업하고 양도일 남운용, 송순갑 등에게 상쇠와 장구를 사사받았습니다. 1959년 전국 농악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으면서 그의 이름은 매스컴을 타게 되었고, 이어 1961년에는 전국 농악경연대회에서 개인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는 우선 각지역마다 제각각으로 흩어진 농악가락을 정리해야 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소실된 부분에는 다른 가락을 채워 넣기도 했으며 뿔뿔이 흩어진 옛 걸립패 선배들을 찾아서 '걸립패 풍물굿'을 복원하기도 했습니다. 지방에 산재한 장구 명인들의 가락과 개인기를 전수받았습니다.

이러한 숱한 노력으로 사물의 가능성을 확대한 그는 1966년부터 일본을 비롯한 세계 50여개 국을 돌아다니면서 사물놀이 순회공연을 펼쳤고, 마침내 1978년 '사물놀이'를 창단함으로써 그 정점에 서게 되었습니다.

1982년 미국 댈러스에서 열린 세계 타악인 대회에서 모든 타악인들을 경탄케 했으며, 그의 무대는 '84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세계 연주자들의 페스티벌 '슈퍼커션', 벤쿠버에서 열린 '월드 드럼페스티벌'로 계속 이어졌습니다. 칙코레아, 허비헨콕, 마일즈 데이비스 그룹 등 일류 재즈 뮤지션과의 합동공연을 성사시켰으며, 미국 순회횡단공연, 일본 순회공연, 올림픽 성화봉송공연 등으로 세계 만방에 우리 소리를 알렸습니다.

또한 정상의 재즈 그룹 레드 선과 만나 이룬 공연들은 CD와LD로 발매되어 주목을 끌었습니다. 인종을 초월한 한민족의 문화대사로서의 역할을 누구보다도 톡톡히 해낸 것이었습니다. 최근 ECM이라는 레코드 레이블에서 또 다시 재즈와 사물의 만남을 녹음한 그는 '세계 시장을 석권할 수 있을 정도로 잘 다듬어진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지금의 과제라고 자신의 현재 위치를 규정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