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그 당시 벨기에는 독일의 베를린으로부터 파리와 칼라이스로 가는
길목에 걸쳐 있는 특수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미묘하게 얽혀져가는 유럽
정세의 거센 바람에 휘말리고 있었다.
1839년의 협정에 의하여 벨기에의 독립과 함께 중립이 인정되면서 벨기에
는 자국의 안전을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러시아 등의 나라로
부터 보장받고 있었으나 유독 그 협정서를 '휴지 조각'이라고 부르며 벨기에
협정을 인정하지 않고 있던 독일은 1914년 8월 2일, 드디어 자국의 병력이
지나갈 통로를 제공하라는 마지막 통첩을 보낸다. 아무런 전쟁 준비도
갖추지 못했던 벨기에가 독일의 요구를 거절하자 독일군은 8월 2일과3일 밤을
이용해 벨기에로 쳐들어가기 시작했다.
독일군이 벨기에의 평원 지대를 신속히 건너기 위해서는 그 지역을
방어하고 있는 리에지와 나무르 지방에 산재한 요새들을 점령하는 것이 가장
절실한 과제였다. 이윽고 리에지의 요새들은 독일군의 곡사포에 맞아 산산이
부서졌지만 비교적 강인한 나무르의 요새들은 8월 25일까지 끈질긴 저항을
하였다.
그 후 로우베인 지역을 비롯하여 도처에서 발생한 벨기에인들의 저항을
분쇄한 독일군은 벨기에의 유명한 도서관과 세인트 피에르 성당을 불태운
다음 10월 6일 마침내 엔트와르프를 점령한다.
그 후에 도처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한 예상외로 끈질긴 벨기에 인들의
저항 운동이 연합군에게는 엄청난 힘이 되었는데, 그 이유는 벨기에인들의
끈질긴 저항으로 모든 작전이 어긋나게 된 독일군의 진격이 한 달 이상
지연되고 있는 틈을 이용하여 자국의 군대를 최상 기준으로 보강시킨 프랑스와
영국이 독일군과 마르네 전투에서 맞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